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 신경숙






어디선가나를찾는전화벨이울리고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신경숙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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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rfedale(1872)
    John Atkinson Grimshaw - Wharfedale(1872)


 인기 많은 우리 누님들 덕분에 어린 나는 집전화를 숱하게 들고 놔야했다. 보통은 누나를 당당하게 찾았지만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야리한 내 목소리를 누나로 착각하고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하던 친구도 있었고, 원하는 사람이 받지 않아 끊어버리는게 어린 나에게도 뻔했던 전화도 있었다.
 
 집전화가 많이 쓰였던 시절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전화를 바꿔주며 가족끼리 모처럼 누구 전화받으라는 짤막한 말과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지 싶기도 하다. 지금에 와서 집전화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있던걸 없애기 허전해서 그냥 둔 애물단지인채로 남아있거나 요금절약이나 받아볼까 하고 이따금 사용하는 용도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들 개인적인 연락수단을 가지고 있는 요즘엔 그나마의 짤막한 대화나 체온의 공유같은 낯간지러운 말조차 아쉬워진다. 아니 아쉬움조차 모를 정도로 무뎌진 것 같다는게 더 솔직한 말인 것 같다. 내가 엄마 핸드폰를 대신 받아드는 일은 드물 뿐더러 그나마도 계속 울리는 벨소리가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만 보아도.
 
 내가 원하는 사람이 받을까 하는 기대와 가족이 대신 받았을 때의 어색함, 바꿔받을 때까지의 짧은 정적동안 느끼는 설레임을 더는 느낄 일이 없다. 누나이길 기대하고 걸었지만 내 목소리에 뚝 끊던 사내들의 기대를 좌절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때마다 느꼈던 짜증을 조금은 보상받는 것 같기도 하다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문명의 이기로 인해 편의와 맞바꾼 애틋함이나 낭만을 아쉬워하는건 아니다. 더 편리해진 만큼 인스턴트식의 연락이 잦아지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통화가 설레이고 기쁜 것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 것들이 알아야만 할 것들로 여겨지는 순간. 했던 말 또 하는 것도 바닥나서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지만 무슨 말이든 하고싶은 마음에 급히 내뱉어진 실없는 얘기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은 분명할 것이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장황한(그리고 사실 감상과 거의 무관한) 얘기들은 사실, 불과 한 시간 전만해도 어느새 잊고 지냈거나 아예 생각조차 못했던 것들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내게 남은 '전화벨'의 여운이 너무 강한 탓이었을까.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중략)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날 불현듯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하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다시 한 번 찾아 읽는 그때도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소설로 탄생하기를요.』 - 작가의 말
 
 
 이밖에도 신경숙이 첫 문장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려퍼지는 것같은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도 했으나 막상 쓰면서는 끊임없이 죽음이 따라나왔다고 했다. 실제로 설레이고 풋풋한 사랑이야기이기 보다는 아끼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야 했던 주인공들이 고스란히 져야 했던 아픔과, 그것을 함께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조차 담담하게 보내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미루를 떠나보내고 상심한 세 사람은 눈이 내리는 밤에 산에 올라가 막대로 가지에 쌓인 눈을 쳐낸다. 이미 부러져 눈 속에 파묻힌 것들을 들어올리면서, 툭 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있게 하늘로 뻗치는 어린 나무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분명하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어둠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막대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어쨌거나 윤은 그렇게 밤 깊은 온 산에 텅텅 눈 털어내는 소릴 울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날 채플시간에 또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학생은 나의 이십대 시절에 비추어 지금 이십대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중략) 나도 모르게, 함께 있을 때면 매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중략) 내 말이 끝난 줄 알았다가 다시 이어지자 학생들이 다시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누군가 왜 사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을 생각해 내기 전에 일단 살아있으니까 하는 변명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우리지만(설마 나만?)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순간과 조우할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글을 쓰려고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별점을 하나 더 보태고 싶어졌다.

(100909 작성)


멍교수
책꽂이/문학 2010. 10. 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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