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선 작품집> 학마을 사람들 外 - 다양한 삶을 꿰뚫는 전후문학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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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쯔'같은 것이죠. 입으나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봉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법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기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 커녕 그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질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 <오발탄 中>
이범선은 <학마을 사람들>과 <오발탄>으로 잘 알려져있다. 각각 중3때 교과서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읽게 된 두 작품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학마을 사람들>은 소설을 통해 얻는 감동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내게 알려준 애틋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는 여기에 나에겐 생소한 다른 일곱작품까지 더해서 총 아홉 편이 실려있다. 새로 읽는 것들엔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것 하나 빠지는 작품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직접 읽어본다면 이것은 내가 관대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었음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작품들은 전후문학답게 삶의 양상이 그 어느때보다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던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시대속의 인간군상을 담고 있다. 심리적.물질적으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추적하지만,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알아채기 알맞을 만치만 숨겨놓아 직설적인 표현보다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힘들어 하고 말하는 사람보다도 그저 내가 가장 쪼그라들었던 때의 모습을 고대로 재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장난처럼 손끝으로 문지르는 아내의 모습이나(오발탄), 한을 풀듯 소의 각을 뜨는 신노인의 신들린듯한 칼놀림(명인)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며 어느새 작품 속에 참여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아등바등 살아내야만 했던 것에 비하면 우리는 체면차리고 인간답게 살기 얼마나 쉬운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지만 추잡한듯한 주인공들의 삶이 사실은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급기야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는데 열중하게 만들고 마는 데에 그의 작품들은 큰 가치가 있다.
<수록작품>
학마을 사람들, 사망 보류, 몸 전체로, 갈매기, 오발탄, 살모사, 명인, 청대문집 개, 삼계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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