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불평등기원론 - 장 자크 루소> 불평등의 유래에 대한 훌륭한 추론






 

 

 

  이번 학기도 많은 책을 읽진 못했지만 유독 신작, 베스트셀러, 문학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열권 남짓한 책 가지고 분류하기도 뭣하군.) 그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고전사상에 대한 관심이 쥐똥만큼 생겨났지만 먼데서 새로운 걸 찾을 용기는 안나 손 뻗으면 닿을 책장에서도 가장 적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어 만만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물론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게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 지겨워할 정도는 아니다. 끝까지 읽는데에 특출난 사명감이나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읽기 힘든걸로 따지면 지루한 소설이 더하면 더했지.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루소의 사상에 대해 논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지금의 내 능력으론 당찮다고 여겨지므로 적절히 요약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인간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은 어디로부터 유래했는가에 대해 그 유명한 자연상태로부터 (현재와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지는)당시의 사회가 형성되기까지 나름의 추론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추론은 물증에 의한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직관과 논리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하고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며 일련의 추론과정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을 자연의 많은 동물들 중 하나의 종으로 보았다. 감정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부모와 자식간의 연대도 없었고 하루하루 배를 채우고 당장의 추위와 위험을 피하는 데까지만 인식이 미치는 지극히도 동물적인 존재였다. 모든 인간들은 따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를 볼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서로 관계를 맺을 이유도 기회도 없었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분같은 것도 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점차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힘과 지혜를 합쳐야 할 기회가 생기면서 초보적인 언어가 발생하고 군집이 형성되었으며,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시간을 보낼 기회가 생기면서부터 우월과 열등이 드러나고 남과 나를 비교할줄 알게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무엇이든 남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서 빈부와 권력의 격차는 날로 커져가지만 가진 자들은 자연법 하에서 생명의 위협은 공통된 것이나 재산에 대한 위협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내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기본권과 각자의 소유를 보장하기 위한 합의였고 이는 결국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유를 일정 부분 양도하여 사회와 법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루소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파괴해버리는 동시에 소유와 불평등을 영구히 고정시켜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서 결국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살육과 전쟁, 살육, 복수와 같은 비극적인 일들을 저지르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루소는 불평등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부터 현재까지 자연상태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계속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렇다고 해서 당장 숲에 들어가 곰과 함께 살 수는 없는 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불평등이 자연상태에 어긋나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기원을 좇아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되짚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각종 제도와 법률, 사회구조와 학문, 심지어 예술과 같은 것들로 인해 인간이 상실하고 만 원초적 평등에 대한 루소의 탄식은 결국 민중들이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절대군주제가 당연시 되었던 시대상황에서 상당히 파격적이었을 그의 저작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마르크스의 메세지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교수님의 의견을 옮겨 적은 흔적이 있다.

  법으로 보장되는 계급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지 오래고 모든 사람이 공히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명시한 헌법이 당연시된 현대이건만 인간은 분명 여전히 불평등하다. 여러가지 제도와 제약으로 인해 그것은 당연시되고 또 공고화된다. 하지만 누구나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해 평가받고 대접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후천적인 역량 또한 선천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요인에 의해 종속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구조는 종종 도전받긴 하지만 당장 획기적인 개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부분적인 수정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제와서 지금껏 쌓아놓은 문명과 제도를 붕괴시키고 벌거벗은 채 숲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재에 와서 절대적인 평등은 불가능하거니와 적정수준의 평등을 부르짖는 목소리 또한 단지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의 컴플렉스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도대체 그 적정수준은 어느정도인가와 현재의 경쟁체제가 정상적인 수준인가에 대한 검증이 그것이다. 이처럼 평등의 가치는 각자의 여건과 가치관에 따라 다른 관점들이 지금까지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역이지만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가 얼마나 옳고 그른지 판단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단지 날때부터 주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그것이 옳지 못한 상태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가야 할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평등한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루소의 사상은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도처에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다."

 



멍교수
책꽂이/비문학 2010. 12. 1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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