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김기림>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낸 공간에서







고부가는 길 II - 강연균
(1982년 / 종이에 콘테, 수채 / 53 x 92cm)





김기림 - 길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의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서였다. 그 유명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다음으로 이육사의 <청포도>가 함께 실려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뒤에도 시 한 편이 더 있었는데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육사의 작품 역시 한국 최고의 명시 중 하나이지만, 유독 김기림이 기억에 남은 것은 다른 시를 통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에게 처음과 같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고등학교때 본 어느 모의고사 지문으로 실린 김기림의 <길>이었다.

  소년은 그 길에서 어머니, 첫사랑, 추억과 같이 소중했던 것들을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함께 갔던 곳들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추억들 때문에 괴로워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길이 화자에게 얼마나 아련한 공간인지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첫사랑을 조약돌처럼 집었다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구절은 참으로 절묘하게 다가온다. 내가 아무것도 몰랐던 어릴 적의 첫 사랑 역시 시작과 끝이 불분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필요 이상의 쓸쓸함에 젖고 만다. 어둠이 씻어준 뺨의 얼룩은 분명 눈물 탓일텐데, 소중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처럼 담담하게 고백하는 화자가 역설적으로 내 마음 구석구석에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멍교수
책꽂이/책갈피 2012. 3. 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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